질투에 대하여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질투는 누구에게나 익숙한 감정이다. 누구나 마음속 어딘가에 질투심을 품고 있으며, 때로는 습관처럼 자각 없이 질투심을 느끼기도 한다. 질투를 하는 것은 눈에 보이지 않는 적을 만드는 것과 다름없기에, 생각보다 많은 에너지를 들이는 일이며 스스로에게도 좋지 못한 영향을 준다. 필자 역시 이와 같은 사실을 어렴풋이 알고 있으면서도 질투가 나를 앞으로 나아가게 하는 원동력이라 위안 삼으며 지내왔다. 그렇다고 질투심이 많은 편인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에 가깝다. 다만 학교라는 공간에 존재하기 시작한 순간부터 ‘질투’의 감정을 분명히 자각했다. 눈에 보이는 결과로 순위가 매겨지는 학교는 유독 인정 욕구와 경쟁의 민낯이 고스란히 드러나는 공간이기에 그랬을지도 모르겠다. 학교라는 작은 사회를 접함으로써 자각하게 된 질투심은 ‘사회’와 질투 사이의 연관성을 짐작하게 한다.
질투라는 정념은 상대뿐만 아니라 질투하는 사람 자신까지 파멸로 몰아넣는다. 게다가 질투는 지칠 줄 모른다. 7대 죄악으로 함께 거론되는 분노와 식탐 같은 악덕도 어느 정도 발산되고 나면 다소 가라앉지만 질투는 다르다. 적당히 질투해서 성에 차는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 성에 차기는커녕 질투심은 점점 더 거세게 불타올라 이성을 뒤흔들기도 한다. 누군가를 질투한다는 것은 찜찜함과 양심의 가책을 수반한다. 질투라는 인간의 지저분한 감정을 바라보는 일은 마음을 괴롭게 하며, 열등감이라는 인정하고 싶지 않았던 자신의 어두운 부분을 들여다보게 하기 때문이다. 동시에 질투를 받는 것 또한 피곤한 일이다. 타인의 악의 담긴 눈빛은 내 마음을 불편하게 하여 나의 행복을 온전히 누리지 못하게 한다. 게다가 질투를 하는 사람은 나의 불행을 바라며 허위 사실을 퍼뜨리거나 신체적 공격을 가할 가능성도 있기에 질투의 대상이 되는 것은 두렵기까지 하다.
지금껏 사회과학에서 질투라는 감정이 등한시되었던 이유는 합리적 계산에 맞지 않는 질투의 성질 때문이다. 사회과학에서 행위자는 기본적으로 자신의 이익을 최대화하려는 합리적인 주체이고, 이러한 관점에서 보면 질투하는 행위는 비합리적이다. 질투는 타인과 함께 나 역시 깎아내리기 때문이다. 이 글은 ‘비합리적인’ 질투에서 벗어나 평온을 찾고 싶은 개인적인 바람에서 시작된다. 질투를 개인적인 감정으로 바라보는 것을 넘어서 거시적으로 바라보고, 질투가 어떻게 구체화 되어 사회에 스며드는지, 또 질투라는 감정에서 벗어나 진정한 ‘자유’를 누리기 위해서 어떤 것들이 필요할지 질투의 본질을 파헤쳐 보고자 한다.
질투의 본질
먼저 질투가 무엇인지 알아보자. 질투는 종종 두 유형으로 구별된다. 양성 질투와 악성 질투이다. 여기서 양성 질투는 상대를 향한 적대적인 감정을 동반하지 않는다. 굳이 따지자면 우수한 상대를 향한 동경에 더 가깝겠다. 일반적으로 양성 질투는 부정적으로 인식되지 않고 사회적으로도 쉽게 용인되지만, 악성 질투는 그렇지 않다. 악성 질투는 양성 질투와 달리 정신적 고통을 동반하며 상대에게 적의를 가지는데, 우리가 일반적으로 떠올리는 ‘질투’는 악성 질투를 의미하는 경우가 많다. 둘 사이의 경계가 모호하므로 모든 질투를 양성 질투, 악성 질투로 나누어 설명하기에는 무리가 있다. 그러나 악성 질투의 경우 양성 질투와 달리 자신이 갖지 못한 상황을 괴로워하고 타인이 그것을 잃어버리기를 갈망한다는 특징을 가진다. 양성 질투는 동경으로 명명해도 충분하기에 악성 질투를 중심적으로 다루려 한다.
질투. ① 사랑하는 상대가 다른 사람을 좋아할 때 지나치게 시기하는 마음 . ② 다른 사람이 잘되거나 좋은 처지에 있는 것 따위를 공연히 미워하고 깎아내리려는 마음. 나름대로 간결한 정의이기는 하나 곰곰이 생각해 보면 대체 어떤 점에서 자기보다 나은 사람인지, 또 어느 정도로 나은 사람이어야 질투의 대상이 되는지가 막연하다. 따라서 질투의 대상을 선정하기 위해서 ‘비교’는 불가피하다. 비교는 상향 비교와 하향 비교의 개념으로 나누어서 설명할 수 있다. 일반적으로 비교는 신체 능력, 지성, 재산, 일상생활에서의 만족감 등에서 자기보다 우월한 타자와 비교하는 ‘상향 비교’, 자기보다 열등하다고 생각하는 타자와 비교하는 ‘하향 비교’로 나뉜다. 이와 같은 비교를 통해 발생하는 질투를 「질투라는 감옥」의 저자 야마모토 케이는 ‘상향 질투’와 ‘하향 질투’로 칭한다. 상향 질투는 비교적 단순하며 이해하기 쉽다. 일반적으로 자기보다 우월한 사람에게 질투를 느끼는 일은 비교적 자연스럽기 때문이다. 자기보다 우위에 있는 자를 보기만 해도 우리는 부러움을 느끼므로 오히려 상향 질투는 당연한 것처럼 받아들여지기도 한다. 그러나 하향 질투의 경우 질투의 대상이 자기보다 우위에 있는 사람으로 한정되지 않는다. 자신이 힘겹게 노력한 끝에 달성했다고 생각하는 무언가를 타인은 쉽게 달성할 때, 자신은 비싸게 샀는데 누군가 운 좋게 싼값에 얻을 때, 상대의 재능과 행운에 질투심을 느낀다. 여기서 재능과 행운은 노력에 따른 결과가 아니다. 자산이 5인 A가 노동을 통해 자산을 10으로 늘렸다고 가정해 보자. 반면 자산이 1인 B는 자산이 1이라는 이유만으로 아무런 노동 없이 국가로부터 3을 지원받아 자산이 4가 된다. 이때 A는 결과적으로 B보다 훨씬 더 많은 자산을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B에게 찝찝한 질투심을 느끼게 된다. 이 사례는 언뜻 도의적 분노로 보일지 모르나, 여기에는 추잡한 하향 질투가 숨어있다.
어째서 자꾸만 자신과 타인을 비교하게 되는 것일까? 비교만 멈추면 질투로 인한 문제는 자연히 해결되고, 자신의 확고한 가치관에 따라 자기 자신다운 인생을 살아갈 수 있을 것만 같다. 실제로 질투를 논하는 여러 책에서 이러한 삶의 방식을 권한다. 너는 유일무이한 존재이니 타인을 신경 쓰지 말고 네 뜻대로 너답게 살아가면 된다는 식이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사람 마음이라는 것은 뜻대로 되지 않는다. 누구나 알고 있듯 타인과 비교하지 않으며 살아가기란 쉽지 않다. 정보화로 인해 타인의 개념이 과거에 비해 훨씬 넓어진 오늘날엔 더욱 그러하다. 이웃, 직장 동료, 친척 정도에 그쳤던 질투는 이제 소셜미디어 속 불특정 다수를 향한다. 소셜미디어는 개인의 일상을 공유하는 공간이면서 동시에 과시와 질투가 자연스럽게 뒤섞여 드러나는 공간이기도 하다. 사람들은 의식적으로든 무의식적으로든 자신의 가장 빛나는 순간들을 올리고, 과시는 질투의 대상이 된다. 사람은 질투하는 것도, 질투받는 것도 달갑게 여기지 않으면서 왜 무언가를 과시하고 싶어 할까?
19세기 후반부터 20세기에 걸쳐서 중산층 계급이나 노동자 계급의 구매력이 높아지며 그들도 사치품을 소비할 능력이 생겼다. 이는 결국 누구나 과시할 수 있게 되었음을 의미한다. 사회 분위기 또한 각자가 가진 부와 명예를 과시하는 것을 부담스러워하거나 유난스럽게 여기지 않는다. 가질수록 숨기고 겸손하던 과거와 달리 경제적 부가 결국 사회적 지위가 되어버린 신자유주의 시대에서는 오히려 체면을 위해 가진 것보다 과도하게 보여주려고 하는 경향도 존재한다. 특히 미디어의 발달은 과시에 박차를 가한다. 소셜미디어의 등장은 과거였다면 알지 못했을 타인의 생활을 엿볼 수 있게 한다. 비교하고 질투할 대상의 범위가 무제한으로 확장된 것이다. 소셜미디어 속 사람들은 가지고 있는 것들을 부풀릴지언정 숨기려고 하지 않는다. 질투를 유발할 만한 것들을 숨기지 않고 대단하다고 여기며 오히려 칭송하게 되었으니 끊임없이 무언가를 자랑하고자 하는 행태는 당연한 결과이다. 소소한 새해 다짐부터 어떤 것을 먹었는지, 회사는 어디를 다니는지, 심지어 열심히 살고자 하는 마음가짐까지 사람들은 쉴 새 없이 과시로 내몰린다.
이에 따라 자본주의는 사람들의 수요에 맞춰 보기 좋은 상품들을 내놓는다. 더 좋은 집, 더 좋은 차, 더 좋은 학교, 더 안정된 심리 상태. 과시가 끊임없는 차별화 게임인 이상 그 욕망을 일시적으로나마 채워 주는 것이 자본주의임은 확실하다. 하지만 자본주의는 단순히 욕망을 채워주는 데 그치지 않는다. 사람들의 욕망을 충족시키는 동시에 그 욕망을 끊임없이 자극하고 이용함으로써 더 많은 소비를 유도하고 스스로를 유지해 나간다. 거대한 자본주의 체제 속에서 과시 게임을 벗어나는 방법이 존재하기는 하는가. 이에 적어도 겉보기에는 차별이 존재하지 않는 사회인 ‘공산주의’에 대해 떠올린다.
평등의 역설
공산주의는 사회주의의 극단적인 형태로, 자본주의를 완전히 폐지하고 계급을 제거한 평등한 사회를 지향한다. ‘평등’한 사회라는 말만 보면, 공산주의 체제 아래에서는 질투라는 감정이 사라질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공정한 과정과 결과 속에서 사람들은 열등감에 괴로워할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열등감이 없으면 질투할 이유도 없다. 예를 들어, 같은 직장에서 동료 간 급여와 혜택이 모두 동일하다면, 누군가를 부러워하거나 질투하기보다는 오히려 공정함을 느끼게 되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러나 이러한 생각은 질투의 본질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함에서 비롯된 논리적 비약일 가능성이 크다. 정말 공산주의와 같이 물질적으로 ‘평등하고 공정한’ 사회에서 질투를 유발하는 요인이 감소할까. 이에 공산주의 사회에서 발생할 수 있는 ‘질투’의 감정을 탐색하기 위해 사고 실험의 방식으로 가상의 사례들을 제시한다.
첫 번째는 눈으로 보이는 사회 구조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지만, 정작 개인의 만족도는 낮은 상황이다. 즉, 사회 안에서 개인이 느끼는 낮은 만족감의 원인을 타인이나 사회 제도의 불공정에 호소할 수 없는 것이다. 사회 구조 자체는 공정하고 완벽하며, 개인의 만족도가 높지 않은 이유는 전적으로 개인의 탓이라고 여겨질 때 과연 우리는 이를 받아들일 수 있는가? 예컨대 같은 수업을 들은 동기가 나보다 더 좋은 성적을 받은 이유가 그 강의를 진행한 교수와 친해서라면 오히려 자존심은 지켜진다. 성적의 기준이 정당하지 않다고 믿기 때문이다. 반대로 모든 점수가 투명하게 공개되어 공정하게 산출된 성적일 경우를 생각해 보자. 이 경우 자신의 능력을 탓하며 오히려 타인에 대한 열등감이 커지곤 한다. 어쩌면 우리는 인생이 잘 풀리지 않는 것을 ‘우연’으로 생각하기에 어떻게든 자존심을 지키며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걸지도 모른다. 두 번째는 눈에 보이는 격차의 감소가 오히려 더 큰 질투를 불러오는 경우이다. 질투가 비교에 기인하는 것이라면 비슷하고 똑같아 보일수록 상대와 자신 사이의 미세한 차이도 견디기 힘들 것이다. 교도소 내 처지가 비슷한 수감자들 사이에서 밀고가 끊이지 않는 것도 비슷한 맥락이다. 비교조차 할 수 없을 정도로 높은 사회적 지위나 권력을 가진 사람들에게 질투심을 느끼기는 쉽지 않다. 질투는 자신과 타인 사이가 동떨어져 있을 때가 아니라 오히려 우열이 가까워질 때 더 쉽게 발생한다. 즉, 비교 자체가 성립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일정한 유사점이 있어야 한다. 공산주의는 일정한 유사가 충족된 사회라고 할 수 있다. 완전한 평등을 추구하는 사회지만 이는 불가능에 가깝기 때문이다. 결국 공산주의가 말하는 정의롭고 공정한 사회에서 질투는 더 만연하고 심각하며, 치졸한 문제가 될 가능성이 있다.
평등과 차이 그리고 질투
‘평등’에 대해 조금 더 파헤쳐 보도록 하자. 민주주의 사회에서도 평등은 매우 중요한 개념이다. 민주주의란 국가의 주권이 국민에게 있으며 국민이 권력을 가지고 그 권력을 스스로 행사하는 제도를 의미한다. 국민이 각자가 가진 권력을 잘 행사하기 위해서 시민 간 평등의 이념은 강조될 수밖에 없다. 민주주의의 중심적 가치라고 할 수 있는 평등을 실현하기 위해 과거부터 많은 제도들이 존재해 왔다. 민주주의의 발원지인 아테네는 시민들이 대등한 위치에서 정치 참여를 할 수 있도록 하는 제도적인 장치를 가지고 있었다. ‘도편추방제’가 대표적이다. 도편추방제는 독재자 출현을 방지하기 위해 시민들이 투표로 위험인물을 10년간 추방하는 제도로, 아테네 시민들은 이를 통해 독재자 출현을 예방하고 민주 정치를 유지했다. 그러나 도편 추방이 질투 배출구의 역할을 했다는 점을 주목해 보자. 고대 아테네 정치가이자 살라미스 해전을 승리로 이끈 영웅 테미스토클레스가 대표적 사례다. 그의 탁월한 리더십과 강력한 정치적 영향력은 시민의 반감과 경쟁자들의 질투를 일으켰고 결국 그는 도편추방제로 인해 아테네에서 추방당하게 되었다. 물론 이 사례에 관한 서술은 살라미스 해전이 발생한 지 1~2세기 이후에 기술된 것이므로 100퍼센트 진실로 믿기에는 증거가 빈약하기는 하다. 그러나 증거가 빈약하다는 점을 감안하고 보더라도 도편추방제에 대중의 질투심이 투영되었음은 분명히 드러난다. 이 사례는 질투와 민주주의 사이의 관계를 이해하는 데 의미 있는 시사점을 제공한다. 질투와 민주주의의 관계는 강한 유대로 얽혀있다.
현재의 민주주의 사회에서도 평등의 원리를 실현하기 위한 제도들은 다양하다. 개인이 평등하게 선거권을 가지고, 정치 영역에서 시민은 평등한 입장에서 의견을 나누며, 평등하게 정치에 참여할 기회를 부여받는다. 그러나 프로이트는 평등과 공정을 향한 요구에 사실은 좋지 않은 감정이 숨어 있다고 분석했다. 프로이트는 「집단 심리학과 자아 분석」에서 ‘공연이 끝난 후 가수와 피아니스트 주변에 몰려드는 열광적인 부인들과 소녀들’의 예를 든다. 처음에는 무대 위 스타에게 가까워지기 위해 경쟁을 하다가도 시간이 지나면 평등하게 멀리서 스타를 지켜보는 것에 만족하게 된다. 프로이트는 이 경험을 통해 사회에서 공동 정신, 단체정신 등의 형태로 작용하는 것 또한 본래의 질투에서 유래했음을 알 수 있다고 서술한다. 즉, 내가 편애받을 수 없다면 우리 중 다른 누구도 편애받아서는 안 된다는 불온한 생각이 공정과 평등이라는 말로 포장된다. 정의와 평등에 추악한 질투심이 달라붙어 있다는 가능성은 보수 정치인들 사이에서 꾸준히 제기되어 왔다. 오스트리아 출신의 독일 사회학자인 헬무트 쉐크는 평등한 사회를 꿈꾸는 유토피아적 욕망은 자기 안의 질투심뿐이라고 말한다. 쉐크는 사람들이 질투하는 것도 받는 것도 견디지 못하기에 평등한 사회를 꿈꾸는 것으로 생각한 듯하다. 오스트리아 출신 경제학자인 프리드리히 하이에크 또한 질투는 상대를 ‘끌어내림’으로써 자신을 위로하는 것이라고 주장하며, 질투심을 ‘정의’로 포장하는 현대 사회의 경향은 자유를 위협하는 존재로 발전하고 있다고 말했다.
민주주의가 요구하는 평등의 이념은 앞에서 언급한 끌어내림 외에 다른 방식으로도 질투와 관련이 있다. 민주화가 가져온 평등 의식은 사람 간의 비교를 폭발적으로 확대했다. 평등함에 대해 인식하자마자 사람들은 서로를 비교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봉건제 해체와 평등화 과정이 진행되면서 사회적 상하 관계와 권위는 점점 해체되었다. 프랑스의 정치사상가 알렉시 드 토크빌은 이와 같은 평등은 민주주의 실현을 위한 필연적 과정이었지만, 이 과정이 사람들 사이에 질투심을 심화시켰다고 말한다. 평등화 이전 사회에서 사람들은 주인을 비교 대상으로 보지 않았다. ‘신분’이라는 명확한 불평등이 존재하는 상황에는 특별한 정당화가 필요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민주주의의 도래로 주인과 자신 모두 똑같은 인간이라는 점을 깨달은 사람들은 여러 영역의 불평등을 체감하게 되었다. 질투는 민주사회의 도래와 함께 평등과 차이라는 개념 사이에서 절묘하게 존재해 왔다. 평등과 차이가 민주주의의 불가결한 구성 요소라면 질투는 민주사회에서 피할 수 없는 존재가 된다. 결국 질투는 민주주의의 조건이자 결과가 되므로 ‘질투가 없는’ 민주주의 사회를 구축해야 한다는 식의 단순한 결론은 설득력을 가지기 어렵다.
그렇다고 질투가 활개를 치도록 마냥 내버려둘 수도 없다. 질투가 과해지면 사람들 사이에 적대심을 조장하고 심각한 문제를 유발하기 때문이다. 경제적 불평등이나 계층 갈등, 정치적 진영 간 적대감이 만연한 현실만 봐도 그러하다. 특히 오늘날 질투는 과거에 비해 그 파급효과는 더욱 부정적으로 작용한다. 사람이 인생에 희망을 품기 위해서는 자신의 인생이 순조롭게 전진하고 있다는 느낌이 필요하다. 이는 자신이 발전하고 있다는 감각과 비슷한데, 여기에는 새로운 곳으로 이사를 하는 것, 새로운 직업을 갖는 것, 승진하는 것 등이 포함될 수 있다. 이를 ‘상상적 이동성’이라 부른다. 그러나 현재는 과거에 비해 점점 많은 사람들이 ‘상상적 이동성’을 경험하기 어려워졌으며, 이는 자신의 인생이 발전하지 못하고 꽉 막혀있는 게 아닐까 하는 의심을 키운다. 상징적 이동성을 경험하기 어려워진 현대에서 질투는 이전보다 더 자주, 더 깊게 발생한다. 예컨대 미국 국적의 백인 중산층 가족 옆집에 이사 온 이민자 가족이 있다고 가정해 보자. 처음에 이민자는 오토바이를 구매하고, 시간이 흐름에 따라 오토바이는 그리 비싸지 않은 자동차로 바뀐다. 그 모습을 본 백인 중산층 가족은 이민자 가족을 석연치 않게 생각한다. 왜일까? 자동차 자체가 부러워서는 아닐 것이다. 자기가 더 좋은 자동차를 타기 때문이다. 그들은 자신이 한 장소에 갇혀 있다고 느낄 때, 오토바이에서 자동차로 바꿔 타는 이웃의 모습에 질투를 느낄 가능성이 크다. 이는 앞서 설명한 ‘하향 질투’라는 용어로 설명된다. 사회적으로 우위에 있는 주류가 자신보다 불리한 위치에 있는 소수자의 성공을 보고 질투심을 느끼며 소외자 집단의 전진을 참지 못한다. 질투는 타인을 끌어내리려는 심리로 작용하며 공동체를 분열시킨다. 하향 질투는 사회적 갈등을 심화시키고 혼란을 불러일으키는 원인이 된다.
민주주의에 질투는 불가결하지만 그렇다고 무작정 방관할 수도 없기에, 결국 민주사회는 질투의 존재를 인정하고 적절히 운용하는 능력을 갖춰야 한다. 우리는 ‘질투’를 어떻게 마주해야 할까.
질투에서 동경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