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쁜 사과보다, 썩은 바구니가 문제다
지금으로부터 약 40여 년 전, 미국 스탠퍼드 대학에는 학교 속 작은 교도소가 존재했다. 어느 날 이곳에 정신적으로, 또 육체적으로 건강한 24명의 대학생이 모이게 되었다. 그들에게는 교도소라는 환경 속에서 교도관과 죄수 집단 중 하나에 속해 생활해야 한다는 규칙이 전달되었는데, 갑작스럽게 마주한 특수 상황에서도 학생들은 상당한 적응 능력을 보였다. 오히려 역할에 과도하게 몰입한 나머지 교도관 집단의 학생들은 권위적이고 폭력적인 행동을 넘어 가혹행위를 서슴지 않았고, 반대로 죄수 집단의 학생들은 점점 수동적이고 위축되는 모습을 보였다. 당초 2주 동안 진행될 예정이었던 일정은 참여자들의 심리 상태를 고려하여 조기 종료되었으며, 이는 오늘날 역사상 가장 유명한 사회심리 실험이라고 꼽히는 필립 짐바르도의 ‘스탠퍼드 감옥 실험’으로 전해지고 있다.
짐바르도는 “나쁜 사과보다, 썩은 바구니가 문제”라고 말한다. 우리는 개인으로서는 도덕적이라고 할지라도, 동시에 비도덕적일 수 있는 집단의 일원으로 존재하기 때문에 언제나 도덕성을 훼손할 가능성이 충분하다는 것이다. 오늘날 잘못된 조직 문화를 바탕으로 여러 집단에서 발생한 사례들을 떠올려 봐도, 집단에 도덕의 잣대를 들이미는 것은 역시 어렵다는 점을 체감할 수 있다. 그런데 비도덕적인 집단이기 전에, 우리는 과연 도덕적인 개인이 맞는가? 엄밀히 말하면 개인과 집단을 막론하고, 이익과 경쟁을 중심으로 타인에 대한 무관심이 만연한 오늘날에 도덕성이 설 자리가 있는지부터 의문이 든다. 도덕성은 여전히 우리에게 분명 당연한 가치인데, 왜인지 모르게 점점 더 추상적이고 체감하기 어려운 것이 되어간다. 현대 사회의 일원으로서, 흐릿해져 가는 ‘우리의’ 도덕성을 이야기하는 시간이 되길 바라며 글을 시작한다.
도덕적인 것들에 대하여
커다란 사회에서 살아가는 사회 구성원으로서, 또 하나의 개인으로서 도덕적인 삶을 마다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우리는 자라오면서 우리를 둘러싼 가정, 교육, 사회 환경 속에서 도덕적인 삶을 지향하는 것이 곧 선이라고 배워왔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떠올리는 ‘도덕성’이란 무엇인가? 다시 말해 ‘어느 정도’의 행위를 하는 것이, 또는 하지 않는 것이 도덕적인지 바로 그 범위가 모호하다는 말이다.
미국의 심리학자 콜버그는 인간의 도덕성 발달에 대해 수준이 존재한다고 말했다. 그의 설명에 따르면, 가장 낮은 수준의 도덕성부터 높은 수준의 도덕성까지 우리는 총 여섯 단계의 도덕성을 발달 과정에 맞추어 발전시켜 나간다. 이때 가장 낮은 단계의 도덕성은 단순히 처벌을 피하고자 도덕적인 행동을 하는 것이다. 마치 영유아기의 어린아이가 부모님에게 혼나기 싫어서, 또는 칭찬받고 싶어서 도덕적인 행위를 하는 것과 같다. 이들은 아마 도덕적인 행위를 하면서도 그것이 왜 행위 자체로 옳고 좋은지에 대해 온전히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그에 반해 가장 이상적인 단계의 도덕성 수준은 ‘보편적 가치’에 따르는 행동을 하는 것이다. 여기서 ‘보편적 가치’란, 생명, 인권, 양심과 같이 보다 추상적이고 높은 차원에 있는 윤리적 영역에 해당하는 가치를 말한다. 즉 콜버그의 이론에 따르면 우리가 꿈꾸는 이상적인 도덕성이란, 그저 나에게 가해질 처벌과 손해만을 고려하는 것이 아닌, 상호 간의 합의 속에서 모두를 위한 공통의 가치를 지켜나가는 사회다.
이러한 이상적인 사회의 도덕 기준을 오늘날에 적용해 보면 어떨까? 분명 같은 수준의 도덕성이라 할지라도, 이는 개인과 집단에게 다르게 다가올 것이다. 무관심이 편리한 현대 사회의 개인으로 살아가면서 타인에게 연민과 공감을 가지고 적극적인 도덕 행위를 실현하는 것은 다소 어렵게 느껴질지도 모른다. 우리가 일상에서 보편적 가치로부터 배제된 누군가를 위해 적극적으로 목소리를 내는 것이 쉽지 않은 것처럼 말이다. 그 대신 우리는 ‘도덕’을 ‘양심’의 영역으로 옮겨 실현하려고 한다. 스스로의 내면이 부당하다고 여길 행동을 지양하며 사는 것은, 무언가 대단한 것을 하지 않아도 충분히 도덕적으로 살고 있다는 느낌을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무리 이렇게 양심적인 개인이 모였다고 한들, 그 사회가 오롯이 양심이 잘 지켜지는 도덕적인 사회가 될 수 있을 거라 확언하기는 어렵다. 우리가 살고 있는 현대 사회는 다름 아닌 화합과 통합 같은 말들이 와닿지 않는 파편화된 사회이며, 고유한 개인들이 집단으로 모였을 때 그 집단 도덕성의 정도와 범위는 쉽게 규정될 수 없다. 집단이라는 거시적 틀은 고작 개인들의 총합으로는 오롯이 치환될 수 없는, 무언가 새로운 틈이 생겨나는 곳이다.
도덕적 개인과 비도덕적 집단
인간은 여러 자연적 욕구를 가지고 태어나며, 죽을 때까지 이로부터 벗어날 수 없다. 오히려 점점 더 커지기만 하는 욕망과 소유를 등에 지고 살아간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무려 사회적 동물이라는 우리가 언제나 내 목소리만 내세우고 살아갈 수는 없는 노릇이다. 우리는 스스로의 이해를 계산할 수 있는 것처럼, 타인이 원하는 욕구까지 고려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 가령 대중교통을 이용할 때 나이가 지긋하신 어른에게 자리를 양보하는 것은, 분명 타인의 이해를 충분히 반영한 행동이라고 볼 수 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타인과 자신의 욕구가 상충할 때 언제나 타인을 위하는 선택을 한다는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우리는 양쪽의 의견을 염두에 두고 조정과 합의를 수행할 수 있는 주체이다. 자타 모두를 인식할 수 있는 힘, 바로 여기서 개인 도덕성의 근거가 발생한다.
그렇다면 집단의 도덕성은 어디에서 비롯되는가?’ 이를 알기 위해서는 현대 집단에 이르기까지 우리가 거쳐 온 집단의 역사에 대해 톺아볼 필요가 있다. 아주 원시적인 사회에서, 집단이 형성되기 시작한 것은 그 필요성이 ‘생존’이라는 공동의 목표로부터 나왔다. 눈앞의 생존을 위해 직접적인 혈연을 중심으로 하나의 유대 관계를 형성했던 집단의 역사는 시대를 거치며 계급, 이념, 이해관계, 취향 등 그 형성 근거가 다양화되었고, 규모 또한 크게 확장되었다. 생존, 계급, 이념 등과 같이 과거의 집단 형성 근거는 오늘날과 비교해 강력해서 매우 낮은 집단 유동성이 특징이다. 힘의 불균형으로 인한 억압은 국가 차원의 강제력을 기반으로 심심치 않게 포착되었으며, 한 집단의 해체를 위해서는 혁명과도 같은 매우 거대한 이벤트가 요구되었다. 어쩌면 이렇게 경직되고 수직적인 사회는 강력한 통제력 아래서 도덕이 법과 함께 잘 지켜졌으리라 기대할 수 있으나, 실상은 그렇지 않았다. 특정 소수에게 전면적으로 주어진 통제력과 이에 수반되는 사회적 강제력은 집단의 형성 근거가 되었던 계급, 이념 등을 앞세워 다수를 학살하고 내몰기 최적화된 수단이었기 때문이다. ‘단일 민족’이라는 강력한 슬로건을 앞세워 공고한 집단을 형성하고, 비도덕과 비인간적 행위로 한 시대를 물들인 나치즘이 그 대표적인 예시라 할 수 있다. 반면, 현대에 이르러서 우리가 여러 커뮤니티를 통해 관심사를 충족시켜 줄 수 있는 집단에 쉽게 가입할 수 있는 것처럼, 현실 공간을 넘어 미디어 속 가상 공간에서까지 집단은 손쉽고 간편하게 만들어지고 있다. 이렇게 많은 집단이 기하급수적으로, 또 시공간의 제약을 초월해 매우 큰 규모로 나타나게 되면서, 집단과 집단 사이의 교류와 소통도 이전보다 훨씬 자유롭게 이루어질 수 있게 되었다. 또한 다중적인 집단에 쉽게 속하고 탈퇴할 수 있는 오늘날에는 집단이 요구하는 정체성이나 가치가 개인에게 정착되기보다는, 교차하는 집단 속에서 개인이 주체가 되어 매번 집단을 선택하느냐, 마느냐의 결정 앞에 놓인다. 이에 따라 사회적 강제력 또한 평소 잠재되어 있다가, 집단의 갈등과 존속 위기의 상황에서 제재가 필요할 때만 수면 위로 올라온다. 이렇게 모든 집단의 역사를 통틀어, 현대 사회는 과거 우리가 국가와 민족, 계급이라는 이름 아래 비도덕을 쉽게 자행할 수 있던 시절과는 분명히 달라진 것 같은데, 그럼에도 여전히 집단의 도덕성을 기대하기 어려운 이유는 왜일까? 다양한 집단이 많아진 만큼, 발생할 수 있는 비도덕과 갈등도 함께 늘어난 것만 같다.
어쩌면 집단에 속하는 행위 자체가 도덕성 약화의 원인이 될 수도 있다는 의견도 존재한다. 사회집단에의 소속이 도덕성에 미치는 영향에 관해 연구한 한 논문에 따르면, 대부분의 집단 소속은 논문에서 설정한 도덕성의 개념인 ‘공정성’과 ‘배려’에 부정적 영향을 미친다고 말한다. 집단에 더 강하게 소속될수록 우리는 스스로의 부정한 행위는 용인하고, 사회적 약자에 대한 배려에는 더욱 인색해진다. 이는 최근 우리 집단의 이해를 관철시키기 위해 폭력을 그 수단으로 쉽게 선택하면서도, 사회적 약자에 대한 이해는 하지 않으려는 많은 단체들을 떠올리게 한다. 우리가 개인으로서 가지고 있던 강력한 도덕성의 근거, 타인에 대한 감수성이 집단에 속하는 순간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다는 사실이 여실히 느껴지는 바이다.
나만 잘하면 되는 개인 상태와 다르게 집단은 사실 구조적으로 도덕성에 취약하다. 오늘날의 집단은 형성이 쉬워진 만큼, 해체되는 속도도 매우 빨라졌다. 강력한 공통의 가치를 바탕으로 집단이 형성되던 과거와 달리 현대 집단은 이를 그저 ‘타인과 연결되기’ 위해 수단적으로 이용하기도 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집단을 공고히 유지하는 데 필요한 구성원의 소속감은 개인에게 그저 부담으로 작용할 뿐이다. 집단 구성원으로서 져야 하는 일종의 책임감 같은 것들은 개개인에게 널리 분산되어 거의 느껴지지 않는다. 도덕성도 그와 같다. 내가 집단 속에서 비도덕적인 행위에 동조했을 때, 그 행동은 나 홀로 한 것이 아니다. 또한 오롯이 내가 주도한 것이 아니기에 책임 소재는 스스로에게 거의 없는 것처럼 느껴지고, 책임이 있다고 해도 그저 그 집단을 떠나면 그만이다. 다중적인 집단에 속할 수 있는 만큼 개별 집단의 구성원으로 느끼는 정체성이나 책임감은 힘없이 분산되고, 개인들의 약화된 의식이 모여 구성된 집단에게 책임감 있는 행동을 기대하는 것은 하늘의 별 따기와 같은 소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