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론

정치는 일치하지 않는 목소리들을 조율하는 과정이다. 정치의 주체는 누구인지, 대화를 통해 각자 다른 주체들이 어떠한 의견을 가지고 있는지를 알아가는 것을 포함한다. 따라서 정치란 대화를 통해 삶의 방식을 모색하는 것이며, 정책으로 나아가는 과정을 뜻한다. 정치와 분리할 수 없는 삶 속에서, 우리는 정치와 어떻게 연결되어야 하는가? 위르겐 하버마스는 『의사소통적 행위 이론』에서 사회를 크게 체제와 생활세계라는 두 층위로 구분했다. 체제는 자본주의 경제와 국가의 행정으로 제도화된 영역을 뜻하고, 생활세계는 시민들 간의 의사소통을 통해 이루어지는 비형식적 삶의 영역을 뜻한다. 하버마스는 공론장을 체제의 주요 영역인 국가와 생활세계에 기반을 둔 시민사회 양자를 매개하는 공공영역으로 정의했다. 즉, 국가와 시민 사회 사이에서 여론이 형성되는 영역이라는 것이다. 이는 특정한 물리적 공간이 아닌, 시민들이 정치적 사안에 관해 대화할 수 있는 곳을 뜻한다. 하버마스에 따르면 서구 근대 민주주의는 공론장에서 진행되는 사회갈등에 관한 토론과 이 토론에 기반한 합의를 통해 해결되는 정치체제다. 그러나 오늘날 국가와 시민사회는 공론장을 통해 연결되어 있는가? 국가는 어떻게 구성되며, 시민사회에서 ‘시민’이란 누구인가? 정치적 대화에서 밀려나는 이들이 늘어나며, 시민의 경계는 갈수록 좁혀져 간다. 소셜미디어는 서로 다른 의견을 수용하지도, 합의를 추구하지도 않는다. 그러한 공간에서 형성된 여론은 극단화된 의견을 재생산할 뿐이다. 공론장을 잃은 정치는 극단화되고, 대중은 제도정치를 ‘알고 싶지 않은 것’ 혹은 ‘싸움판’으로 치부한다. 정치 참여의 효능감을 느끼지 못하는 이들은 정치에서 멀어지고, 결국 정치적 대화를 삶으로 가져오지 않는 결과에 이르렀다. 정치적 대화를 삶으로 가져오기 위해 선행되어야 하는 것은 정치의 언어에 대한 고민이다.

정치의 언어, 외유내강이 필요하다

정치는 왜 대화로부터 멀어지는가? 오늘날 정치권에서는 공격적이고 편향된 언어가 난무한다. 분노하기 위한 이유를 찾아, 분노에서 그치는 언어를 뱉는 행위에만 치중된 듯 보인다. 정치의 언어는 힘을 잃어가는 동시에 힘을 쥐어가고 있다. 언어가 가져야 하는 무게와 토론의 가능성, 대안을 이끌어낼 수 있는 힘은 사그라들고 있다. 정치적 선동과 비난, 정치적 극단화로 사람들을 이끄는 힘만이 남았다. 언어는 그 영향이 어떻게 뻗어가고 공명할지를 염두에 두고 사용해야 한다. 이를 고려하지 않고 자신의 주장을 드러내는 것에만 몰두한다면, 언어는 그 힘을 잃는다. 정치가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공격을 수단으로 사용할 수 있는 만큼, 그 위험성은 필연적으로 수반된다. 다만 공격만을 목적에 두고 극단적인 언어를 수단으로 삼는다면, 언어는 대화를 이끌어낼 수 있는 가능성을 잃는 결과를 가져온다. 서로를 공격하고 싸우는 행위 또한 정치의 본질이다. 다만 싸움에는 이견을 인정하고 서로 타협점을 찾아보자는 태도가 전제되어야 한다. 더 많은 사람들을 포용할 수 있는 부드러운 방식과 단단한 내실을 갖추어야 한다. 외유내강의 기술이 필요한 시점이다.

지난 5월 9일, 정경대학 학생회 ‘더나은’이 이준석 대선 후보를 강연회 연사로 초청한 것에 대해 학생소수자인권위원회(이하 ‘학소위’)가 규탄하는 대자보를 붙여 양측의 갈등이 심화되었다. 더나은과 학소위의 갈등은 퇴행하는 한국 정치의 축소판처럼 보인다. 민주주의는 갈등을 다루기 위해 만들어진 체제이며, 갈등은 곧 민주주의의 존재 이유이다. 정치는 더 많은 이들과 갈등을 공유하고 해결책을 찾는 역할을 한다. 이러한 측면에서, 양측의 언어가 민주주의자의 언어라고 할 수 있을지 의문이 든다. 학소위가 단순히 자기 주장을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세상의 변화에 기여하고 싶었다면, 많은 사람들을 설득하고 유의미한 파장을 만드는 방식을 지향했어야 했다. 정경대 학생회장의 대처 역시 자신이 어떤 입장인지를 보이는 것에서 그쳤다. 감정이 아닌 논리로, 공격이 아닌 설득으로 공론장을 만드는 성숙한 대처방식을 보였다면 어땠을까. 정치인들이 소셜 미디어를 활용하는 것은 소통을 강화하기 위한 것이지 품격을 내려놓고 개인의 감정을 마구잡이로 표출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다. 어떤 정치인이든 공론장을 저버리고 공식적인 논의와 대화를 무시한 채 소셜 미디어에 의견을 올리는 것을 좋게 보는 사람은 없다.

갈등 속에서 공동체적 합의를 이끌어내는 것이 민주주의의 본질이다. 이렇듯 양측의 갈등은 민주주의에 대한 이해가 부족했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학소위가 인권의 관점에서 이준석 대표의 문제점을 비판하는 것과 이준석 대표 자체를 이견의 상대로 인정하지 못하는 것은 다른 문제이다. 더나은이 활동의 일환으로 모든 대선 후보를 초청하고 이를 위한 자리를 마련한 것은 그 자체로 문제 되는 부분이 없었다. 적어도 절차적으로는 말이다. 이 자체를 혐오 정치에 동조하는 것으로 볼 수도 없다. 차라리 학소위가 이준석 대표의 방문을 앞두고 정치적 의사나 반대 논리를 펼치거나, 더 나아가 강연회에 참석해 유의미한 질문을 던지고 토론을 유발해 지지를 얻었어야 했다. 강연회 자체를 정치적 토론의 장으로 활용할 기회와 의무가 학소위에게 있었다. 그러나 이 상황을 계기로 정경대 학생회장이 학소위라는 학생 자치 기구의 존폐를 논한 것은 공론장을 없애는 것을 넘어 민주주의 파괴에 가깝다. 학소위뿐만 아니라 어떠한 학생 자치 기구도 정당한 이유 없이 존폐가 위협되어서는 안 되며, 어떠한 학생회 또는 학생회장도 그들의 권리를 침해할 수 없다. 해당 사안을 돌아보고 기록함으로써 우리는 근본적인 질문 앞에 서게 된다. 사라진 공론장에서 우리는 정치에 대한 담론을 어떻게 나누어야 하는가?

민주적인 정치는 힘 있는 언어에서 비롯된다

아무도 없는 숲에서 나무가 쓰러지면 소리가 날까? 지각되지 않는다고 해서 존재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담론장의 부재로 사라지는 목소리들이 있다. 정치인들이 말하고자 하는 것에서 말하지 않고자 하는 것을 들어야 한다. 그들이 귀를 기울이지 않으려 하는 것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대중은 대화의 당사자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면 듣고 말하는 일에 무관심해진다. 우리가 정치를 통해 읽어낼 수 있는 것은 무엇이 대화의 주제가 될 수 있고, 이를 어떻게 함께 다루어야 하는지이다. 그러나 정치가 공동의 이해를 세우는 것이 아닌, 주의를 끌기 위한 자극적 선동이 될 때 정치는 대화에서 멀어진다. 선동과 지지가 그 자리를 차지하고, 대중은 양극화되는 이들과 참여하지 않는 이들로 나뉜다. 지난 1월 19일 윤석열 전 대통령의 구속영장 발부 소식이 전해지자, 윤 대통령 지지자 300여 명이 서울서부지방법원을 습격하고 불법 점거하며 폭동 행위를 감행했다. 절반을 넘는 이들이 20∼30대 청년이었다는 점은 청년세대 극단주의의 측면을 시사한다. 이러한 폭력이 음지에서 양지로 올라오게 된 원인은 정치권에 있다. 말의 수준에서 행위의 수준으로 진화한 것이다. 공인의 발언은 사람들에게 영향을 미치고, 서부지법 난동의 사례와 같이 행동의 근거가 될 수 있다. 그렇게 극단주의는 정치인들의 언어를 통해 정당화된다.

서부지법 난동은 2021년 1월 6일에 있었던 미국 의사당 폭동과 상당 부분 겹쳐 보인다. 당시 선거에서 패배한 트럼프는 폭동이 일어나기 직전 지지자들에게 한 연설에서 “맹렬히 싸우지 않으면 더 이상 나라를 갖게 되지 못할 것”이라며 “우리의 힘을 보여줘야 한다. 의회로 가라”라고 발언했다. 그의 지지자들은 국회의사당에 난입하여 무력으로 점거하는 폭동을 일으켰다. 이후 트위터(현 X)는 트럼프의 계정을 영구 정지시켰으며 “트럼프 대통령 계정의 최근 트윗들과 이를 둘러싼 맥락, 특히 이들이 트위터 안팎에서 어떻게 수용되고 해석되는지를 면밀히 검토, 추가적인 폭력 선동의 위험성 때문에 이 계정을 영구 정지시켰다”라고 밝혔다. 오늘날 정치인들의 선동적 언어는 소셜 미디어를 통해 넓고 빠르게 퍼진다. 이러한 접근은 사회적 공론장의 기능을 감소시키고, 특정 집단에 대한 분노를 자극하고 동원함으로써 포퓰리즘을 증가시킨다. 일례로, 트럼프 대통령은 트위터를 통해 바이든 당선인 취임식 불참을 알리며 지지자들을 “미국의 애국자들”로 지칭했다. 그리고 그들이 “미래로 오래 이어질 거대한 목소리를 갖게 될 것”이라고 밝혔다. 트위터는 이런 성명들이 “다른 사람들이 6일 발생한 폭력적 행동을 모방하도록 자극할 것으로 보이고, 실제 이것이 그렇게 하라고 독려하는 것으로 수용되고 이해되고 있다는 복수의 징후들이 있다”라고 밝혔다. 극단주의자들과 정치인들이 결탁할 때 정치는 전체주의적 충동으로 지배될 수 있다. 한나 아렌트는 정치적 다름을 적대와 폭력으로 밀어내려는 전체주의적 충동이 공동체를 치명적인 파괴로 몰아갈 수 있다고 말했다. 극단주의자들의 언어가 메아리치는 곳에서 사람들은 자신의 이념에 매몰되고, 그 과정에서 공격의 대상을 설정함으로써 단단한 경계를 짓는다. 우리에게 놓인 과제는 의견의 차이를 공동의 삶으로 연결해 줄 공론장을 복원하는 일이다.

환대의 공간으로서의 광장, 그리고 지속가능성

서부지법 난동은 한국의 극단주의가 가지는 특이성을 보여주는 사례이기도 하다. 현재 한국의 극단주의는 집단적 폭력과 헌정의 위기 등으로 이어지고 있다. 더욱 심각한 것은 집단극단화 현상이 초래한 선동과 혐오가 청년층의 정치적 표현 수단으로 정당화되고 있다는 점이다. 집단극단화 현상은 같은 조직의 사람들이 같은 생각만 지속해서 되풀이하다 보면 극단적인 맹신으로 이어지게 되는 것이다. 극단주의를 기반으로 하는 정치 폭력의 확산을 막기 위해서는 정치적 차이를 존중하는 공론장의 형성이 시급하다. 한국 청년층의 집단극단화 현상을 어떻게 극복해야 할까? 이와 대비되는 사례로는 계엄 사태를 기점으로 광장에 모인 시민들의 연대를 들 수 있다. 광장은 시대의 목소리가 담기는 곳이다. 응원봉과 깃발로 모인 공동체들은 노동자, 농민, 장애인 등 여러 집단의 주체들과 함께 시위에 참여하며 정치적 주체가 되었다. 각 위치의 주체들이 나이, 직업, 인종, 성별, 장애 등에 구애받지 않고 자유롭게 발언했다. 선동적 언어가 메아리치는 것이 아닌, 자기서사를 증언하는 주체들에게 경청하는 곳이었다는 점에서 광장의 가능성을 모색할 수 있다. 소수자와 사회적 약자, 이주민, 노동자를 비롯해 사회에서 소외되었던 목소리들이 비로소 살아났다. 광장은 목소리를 낼 권리가 보장되는 곳이다. 이들의 삶을 이야기할 수 있는 곳이, 이들의 자기서사를 들어줄 수 있는 곳이 광장이 아니면 어디겠는가. 2025년의 광장은 그들에게 밀려나지 않고 온전히 구성원이 될 수 있다는 감각을 제공했다. 타인의 삶을 직접 듣기 전에는 그들이 목소리를 내는 이유가 무엇인지, 그리고 그들의 목소리를 들어야 하는 이유가 무엇인지 알 수 없다. 공동체의 기억은 목소리에 힘을 싣는다. 과거가 반복되지 않는 미래를 그릴 힘이다. 서로 다른 존재들이 함께 살아갈 수 있는 세계에 닿을 수 있도록, 소리 없는 죽음을 들여다볼 수 있도록. 법원에 테러를 감행하며 헌정질서를 파괴하고 사회와 단절되는 방향으로 향하는 극단주의자들과 달리, 광장의 대중은 타인의 삶에 경청하고 그 자체로 받아들이며 사회와 연결될 수 있다. 서로 다른 주체들이 하나의 세계를 함께 구성하고 존재하려는 노력이다. 목소리가 없다면 권리도 없다. 우리가 누리고 있는 권리들은 오랜 목소리 끝에 얻어낸 것들이다. 중요한 것은 광장이 미래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계엄 사태가 진정되고 새로운 정권이 들어선다고 민주주의가 복원되는 것일까. 광장의 목소리들이 일상에서도 묻히지 않고 들려올 수 있을까. 견고한 바닥인 줄로만 알았던 민주주의도 흔들릴 수 있음을 알게 된 지금, 우리의 민주주의가 어디에서 비롯되었고 어디로 흘러갈 것인지를 살필 때다. 타인이 설 자리를 살피고 배제하지 않는 광장의 질서를 기억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광장의 말들을 옮겨적어 본다. SNS에서 ‘말빛’으로 활동하는 시민 이지완 씨가 기록한 집회의 발언들이다.

“제가 말하고 싶은 건 당사자성에 대한 이야기가 아닙니다. 세상은 아주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어서 한 개인에게 가해지는 폭력은 언제나 개별 존재에게만 할당되는 것이 아니라는 겁니다. 혐오는 불처럼 번지기 쉽습니다. 가장 낮은 자에게 보장된 안전은 어느 누구에게나 벼랑으로 떠밀렸을 때 몸을 받아주는 안전망이 된다는 말을 하고 싶었습니다.”

1월 3일 한강진역 관저 앞, 익명의 청년

“이렇게 외쳤더니 이게 방해라고 하고, 그렇게 우리는 또다시 폭도가 되고, 누군가는 이렇게 말하면 미움밖에 받지 않는다고 합니다. 이런 방식을 사용하지 말라고 합니다. 지금은 그런 말을 할 순서가 아니라고 합니다. (중략) 우리는 대체 몇 명이 더 죽어야 말할 수 있는 순서가 오는 겁니까? 언제가 되어야지 나중이 아닌 지금 말할 수 있는 겁니까? 살려달라는 말이 어떻게 순서를 지켜 나올 수 있습니까? 살고 싶다는 말이 어떻게 조용해질 수 있습니까?”

3월 13일, 야생맘마먹음이보존협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