질문 한 줌
인간의 여정은 사소한 질문에서 시작됐다. “이렇게 하면 어떨까?”라든가 “이거는 왜 안 되지?” 같은 작은 질문에서 말이다. 바람이 부는 방향을 읽는 어부도, 별을 바라보던 시인도, 역사의 기록을 더듬던 학자도 사소한 것에서 의문을 품었다. 물음은 삶의 속도를 늦추고 세상을 다르게 보게 만든다. 누군가는 길가의 풀에서 계절을 읽었고, 누군가는 한 줄의 시에서 인생을 발견했다. 누군가는 오래된 기억 속에서 오늘을 비추었다. 느림과 집요함이야말로 인간만의 방식이다. 그러나 지금 우리는 질문보다 답이 더 익숙한 시대에 살고 있다. 질문을 파고들어 생각하기도 전에 다른 것들이 틈새를 비집고 들어온다. 검색이라는 쉬운 길로 답을 얻고 생각하는 시간은 점점 줄어든다.
고대 철학자들은 시장 한복판에서 대화를 나누며 세계의 본질을 탐구했다. 그들의 대화는 지식을 쌓기보다 삶의 방향을 찾는 과정이었다. 역사는 조각나 흩어진 기억을 모아 우리가 어디서 왔는지 알려주었다. 이 두 가지를 징검다리처럼 이어주는 것이 삶의 의미를 묻는 인문학이다. 변하는 세상에서 우리는 편리하고 효율적인 것들을 추구한다. 하지만 이것들이 모든 것의 답이 되지는 않는다. 빠르게 흘러가는 시간 속에서 우리는 종종 길을 잃곤 한다. 헤매는 우리에게 철학의 질문, 문학의 이야기, 역사의 목소리는 우리가 지금 어디 있는지 돌아보게 한다. 너무 빨리 달리면 알아채지 못하는 것들이 있다. 느린 속도 속에서만 발견되는 진실이 있다. 서두르는 자에게는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
인문학의 가치는 실용적이지 않다는 편견에 가려지곤 한다. 그렇지만 당장 명쾌한 답을 주지 않는다고 무가치한 것은 아니다. 삶은 계산으로만 설명되지 않는다. 역사의 기록은 숫자와 통계로 환원되지 않는 결을 지니고, 철학은 해답보다 더 많은 물음을 남긴다. 그 물음이 우리를 생각하게 하고, 살아있게 한다. 질문을 품고 사유하는 것은 생존의 방식이자 인간의 방식이다. 깊이 있는 질문은 단단한 뿌리가 되어 휙휙 변하는 세상에서도 나만의 생각을, 기준을 흔들림 없이 지켜준다.
지금 우리는 인터넷 시대를 지나 인공지능 시대를 살고 있다. 이렇게 변하는 세상 속에서 인문학만 붙잡고 머무르자는 말이 아니다. 다만 주변부로 밀려난 듯한 인문학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해 보자는 것이다. 기술의 시대에서도 인문학의 역할이 있을 것이니.
‘생각’한다는 것 : 철학
‘생각’은 다른 말로 ‘사유(思惟)’다. 우리는 하루에도 수없이 걷고, 멈추고, 선택한다. 그 모든 순간에는 나름의 이유가 숨어 있다. 이유를 찾고 해석하는 과정이 곧 사유이며 철학은 그 과정을 깊이 들여다보게 해주는 징검다리다. 철학에서는 생각이라는 단어보다 사유라는 단어를 더 자주 쓰곤 한다. 이 단어가 주는 묵직함과 어색함 때문에 우리는 철학을 어렵다고 느끼는 것일지도 모른다. 사유는 생각보다 가까운 곳에 있다. 사소하지만 아침에 무엇을 입을지 고민하는 순간과 누군가의 말에 답을 고르는 순간, 길을 건너기 전 멈춰 서는 순간에도 사유는 깃들어 있다. 철학은 특별한 깨달음을 얻는 날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평범한 하루에 조용히 스며든다. 생각하는 일 그 자체가 이미 철학이기 때문이다.
‘악의 평범성’이란 말을 들어봤는가? 한나 아렌트의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의 아돌프 아이히만은 유대인 수송을 담당하는 행정관에 불과했다. 직접 총을 쏘지도, 학살을 명령하지도 않았다. 그저 기차 시간표를 정리하고, 서류에 도장을 찍었을 뿐이다. 하지만 그의 ‘업무’의 결과로 수많은 생명의 운명이 바뀌었다. 아렌트는 아이히만을 괴물로 묘사하지 않는다. 괴물보다는 생각하지 않고 명령을 고분고분 따른 평범한 관료라 묘사한다. 생각을 중단한 개인은 체계 안에서 악의 입력값을 그대로 출력하는 기계가 되어버렸다. ‘상식적이고 평범한 관료’의 얼굴을 한 그는 법정에서도 자신은 명령을 따랐을 뿐이라는 말만 반복하였다. 악의 평범함은 여기서 탄생하였다. 명령에 복종하고 시키는 일에 열중할 수밖에 없었다는 그의 말은 그에게 면죄부를 주지 않는다. 타인의 고통을 무시하고, 자기 행동의 결과를 생각하지 않은 채 업무처럼 악을 집행한 그의 모습이 사유하지 않는 자의 실체이다. 아렌트가 경고했던 것은 특별한 모습의 악이 아니라 생각하지 않는 평범함이 만들어낸 악이다.
오늘날 우리도 주어진 세계에 순응하며 살고 있는 것만 같다. 무감각하게 릴스를 넘기고 알고리즘이 선택해 준 콘텐츠 중에 무엇을 고를지 고민한다. 심각하고 진지한 것들보다는 단순한 유희를 선택한다. 근본적인 이유를 묻는 말과, 그 질문을 할 수 있는 공간은 서서히 자리를 잃고 있다. 그리고 그 빈 자리는 시스템이, 기계가 제공하는 선택지가 대신 채운다. 우리는 기호에 맞게 재밌어 보이는 것을 고르기만 하면 된다. 이에 익숙해진 나머지 우리는 생각의 방향을 외주화하고 있지는 않은가? 생각하지 않는 이는 언제든지 쉽게 조작할 수 있고, 악을 구분하지 못할 수도 있다.
소크라테스는 너 자신을 알라고 했다. 자아를 인식하는 것을 넘어 끊임없이 묻고 답하라는 뜻이다. 정의가 무엇인지 알기 위해 오늘날 우리는 책과 논문을 읽을 필요도 없다. 검색창에 입력하면 답을 얻는 데 몇 분도 걸리지 않는다. 플라톤의 사상과 롤스의 정의론을 일목요연하게 정리해 준 자료를 눈 깜빡할 사이에 손에 넣을 수도 있다. 하지만 그저 읽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소크라테스는 무지를 자각하는 것을 지혜의 출발점이라 여겼고, 사람들에게 정답을 주기보다는 스스로 생각하게 길을 열어주었다. 남이 제공해 주는 답 대신 스스로 생각해 답을 찾아내야 비로소 진짜 ‘나의 답’을 찾을 수 있다는 것이다. 소크라테스의 말은 지금도 유효하다. 생각하는 자만이 자기만의 기준을 지키고, 어떤 물음이든 자기만의 답을 찾을 수 있다.
기술이 발전하더라도 인간은 여전히 스스로 생각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우리가 던지는 질문 하나에도 의도가 스며들어 있고, 기계에 묻는 단 한 줄의 문장조차 어떤 답을 얻고 싶은지 스스로 고민한 끝에 나온다. 빠른 답은 기술이 줄 수 있겠지만, 질문의 방향을 정하는 일은 우리의 몫이다. 질문을 세운다는 것은 세계를 바라보는 나만의 틀을 만드는 일이다. 만약 그 틀이 없다면 우리는 주어진 답에 맞춰 사고방식을 바꾸는 수동적인 존재로 남게 될지도 모른다. 그렇기에 철학은 우리와 계속 함께해야 한다. 사유하고, 의심하고, 해석하는 과정에서 우리는 누가 대신 내준 답을 걸러낼 나만의 필터를 만든다. 그 필터는 단순히 취향이 아니라 내가 세계를 해석하는 기준이 되고, 철학과 인문학은 그 기준을 세울 시간을 준다. 빠른 길을 알려주는 것이 아니라 돌아가더라도 왜 그 길을 택해야 하는지 생각하게 만든다. 기술이 우리를 목적지까지 데려다줄 수는 있지만, 그 길이 왜 존재하는지, 우리가 정말 그 길을 가고 싶어 하는지는 우리만이 대답할 수 있다. 멈추지 않는 질문이야말로 변화하는 세상 속 나침반이다.
사람들은 말한다. 변화하는 세상을 빨리 쫓아가지 않으면 도태된다고. 기술이 도래한 세상에 철학은 구시대적이라고. 정말 그럴까? 변화하는 세상 속에서도 제자리를 지키는 것이 하나쯤은 있어야 하지 않을까?
완전히 이해할 수 없음에 대하여 : 문학
요즘은 인공지능이 이야기를 쓴다. 학습한 데이터와 패턴을 조합해 그럴듯한 서사를 만들어내는 것이다. 그러나 문학은 알고 있는 것을 반복하는 예술이 아니다. 존재하지 않는 세계와 말하지 않았던 이야기를 언어로 구현하여, 아직 도달하지 못한 감정과 서사를 상상해 만들어내는 것이다. 문학에서 상상력이란 기발한 이야기를 만드는 것은 물론 타인의 고통, 슬픔, 행복을 어떻게 다룰 것인가를 대하는 태도라 할 수 있다. 말하지 않았던 감정, 외면당했던 고통을 대신 말할 때, 행복했던 순간을 대신 전할 때. 누군가의 삶을 재구성하여 그 고통과 행복을 가볍게 다루지 않겠다는 약속이기도 하다. 어떻게 상상할 것인가를 되뇌며 타인의 고통 앞에서 조심스러워지는 마음, 그것이 문학의 첫걸음 아닐까?
인간은 기쁨, 분노, 슬픔, 즐거움 등 감정을 느끼고 표출한다. 그런 감정은 어느 순간 갑자기 나타나지는 않는다. 살면서 축적된 경험과 시간의 흐름에 따른 감정의 변화 같은 복잡 미묘한 과정을 거친 후 탄생한다. 이런 복잡한 과정을 기계가 모방할 수 없다. 인간의 감정을 수치로 환산하거나, 표정과 말투를 흉내 내는 수준에는 도달할 수 있을지 모른다. 어디까지나 직접 경험하지 않은 허상에 불과하지만 말이다. 그래서 인간이 느끼는 감정과, 감정과 경험의 전이에서 찾을 수 있는 공감은 기계가 학습하는 데이터만으로 모방하기에는 역부족인 것이다. 인문학과 문학. ‘느끼는’ 존재인 인간을 언어로 표현하고, 이해하고, 공유하게 만든다. 소설이라는 가상의 세계에서 인간은 등장인물의 서사를 글로 경험하고 함께 느낀다.
문학은 감정을 개인 안에 가두지 않는다. 한 사람의 감정은 사회 전체의 기억과 연결되고, 시대의 고통은 소설 속에서 살아난다. 소설 속 누군가의 울분, 분노, 상실감은 한 시대를 관통하는 감정이 되기도 한다. 소설은 가상의 세계를 통해 개인의 감정을 사회적 맥락으로 이어주고, 외면했던 감정들을 다시 불러낸다. 말해지지 않은 감정은 사라지지만 문학이 그 감정에 말을 걸고 이름을 붙여 살아있는 인물로 만들어준다. 침묵한 감정의 이면을 글로 써 사회의 기억으로 만들어주는 것이 문학이 존재하는 이유일 것이다. 소설 <채식주의자> 속 영혜의 육식을 거부하는 심리와, 몸을 갉아 먹듯이 말라가는 과정은 개인의 이상행동으로 치부될 수 있었다. 그 이면에는 감춰진 구조적 폭력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이야기는 그 폭력을 글로 그려낸다. 영혜라는 인물을 통해 가족의 억압, 여성에게 강요된 규범, 말로 표현되지 못한 내면의 붕괴가 살아 움직인다. 이때 영혜의 침묵은 개인의 고통이 아니라 그 시대가 외면하고 있던 감정의 잔해로 바뀐다. 인간이기를 거부하며 스스로 식물이 되어가는 장면은 인간다운 삶을 박탈당한 존재가 남긴 마지막 저항이 된다. 그제야 우리는 우리에게 묻는다. 얼마나 오랫동안 감정을 사회 바깥으로 몰아냈는지.
영혜는 자신이 더 이상 인간이기를 원치 않는다고 했다. 그녀의 절규는 설명할 수 없는 고통과 언어로 해석되지 않는 내면의 파열음이다. 영혜의 고통을 독자는 이해하고 공감할 수 있다. 다른 등장인물은 그녀를 이해하지 못하지만 말이다. 그들은 영혜를 이해하려는 노력 대신 그녀를 이상한 사람이라 부르며 그녀의 고통에 끝내 닿지 못한다. 사회적으로 이해받지 못한 영혜는 소통 불가능한 존재가 된다. 소설 밖의 우리는 그녀를 이해하지만, 소설 속 인물들은 그녀를 이해하지 못하는 모순적인 공감의 양면성이 성립된다. 이야기가 타인을 이해하는 수단임과 동시에 타인을 완전히 이해할 수 없음을 인정하는 수단이 된 것이다. 우리도 영혜의 고통에 완전히 닿지 못할 수도 있겠지만, 그 고통을 향해 한 걸음 다가가 볼 수는 있다. 침묵으로 일관하는 영혜의 세계에 우리는 말을 걸지만, 돌아오는 건 여전히 침묵일 뿐이라도 말이다. 침묵 속 기다림의 과정에서 우리 안의 감각이 예민하게 살아난다. 소설의 마침표 그 뒤에서 우리의 새로운 시작을 마주한다. 영혜의 침묵 속에서 무엇을 읽어내야 하는가? 온전히 이해하지 못하는 한계 속에서 우리는 무엇을 배워야 하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