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같은 세계를 살고 있지 않은” 기후위기
“기후위기는 인류 모두가 함께 마주한 과제입니다.”
캠페인 슬로건, 정부 보고서, 국제회의. 모두가 이 말을 되풀이한다. 마치 우리 모두가 ‘하나의 동일한 위기’를 ‘동일한 방식’으로 경험하며, 그 위기 앞에서 연대하는 것처럼 들린다. 그러나 이 문장은 너무 많이, 너무 쉽게 말해졌고, 그만큼 많은 것을 감추고 있다. 정말 우리는 같은 위기 속에 살고 있을까?
오늘 하루만 돌아봐도 답은 쉽게 나온다. 오늘 당신은 무엇을 ‘위기’라고 느꼈는가? 누군가는 기록적인 폭염 속에서도 냉방기기를 켤 수 없는 방 안에서 땀을 훔쳤을 것이고, 누군가는 무더위를 피해 해외로 떠났다. 어떤 이는 치솟는 전기요금 청구서를 보고 한숨을 쉬지만, 어떤 이는 요금을 신경 쓸 필요가 없다. 원자력발전소 인근에서 방사능 유출을 걱정하며 살아가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그 전기로 돌아가는 도시 한복판에서 하루를 아무렇지 않게 보낸 사람도 있다.
‘기후위기’는 결코 단일한 풍경이 아니다. 누구에게, 어떻게 다가오는가에 따라 전혀 다른 얼굴과 무게로 삶에 스민다. 누군가는 이를 정책과 협약, 수치와 배출량으로 설명하고, 누군가는 매일의 체온과 피부로 살아낸다. 어떤 이에게 위기는 국제 회의장에서 협상되는 목표치이지만, 또 다른 이에게는 켜지지 않는 난방기, 물에 잠긴 마을, 다시는 돌아오지 않는 계절 풍경일 수 있다. 그리고 위기에 대해 말할 기회조차 갖지 못한 채 침묵을 강요당하는 이들도 있다.
같은 ‘지구’에 산다고 해서 같은 ‘세계’를 공유하는 것은 아니다. ‘모두의 위기’라는 말은 연대의 가능성을 열지만, 동시에 그 안에 담기지 못하는 수많은 감각과 언어를 가린다. 위기를 인식하고 발화할 수 있는 자리는 누구에게나 주어지지 않는다. 위기를 구성하는 언어와 지식은 불평등하게 배분되고, 그것을 감각할 수 있는 조건 또한 자원과 위치에 따라 갈린다.
오늘날 기후위기 담론은 주로 과학의 언어, 수치의 언어로만 구성된다. 객관성과 검증 가능성을 이유로 숫자는 신뢰를 얻지만, 그 안에는 담기지 않는 세계가 있다. 추운 방 안에서 전기장판 하나 켜지 못한 몸의 떨림, 해안 침식으로 삶터를 잃은 사람의 불안, 도시 밖으로 내몰린 공동체의 침묵은 통계로 환산되지 않는다. 이 감각들은 ‘비과학적’ ‘비합리적’이라는 이유로 쉽게 배제된다.
우리는 어떤 것을 위기라고 부르는가? 무엇은 위기로 인정받고, 무엇은 끝내 언어화되지 못하는가? 그리고 그 언어화의 기회는 누구에게 주어지고, 누구에게 박탈되는가? 기후위기를 둘러싼 감각과 해석의 불일치는 갈등을 낳지만, 종종 ‘설명할 수 없는 일’로 치부된다. 그러나 설명되지 않는다고 해서 존재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설명의 바깥에 놓인 감각과 침묵, 존재 방식을 어떻게 읽어내고 조율할 것인가는 지금 우리가 던져야 할 질문이다.
우리는 정말로 같은 위기 속에 살고 있는가?
이 물음은 이제, 현실에서 부딪히는 수많은 목소리와 장면들을 통해 다시 질문되어야 한다.
누구의 위기인가: 서로 다른 세계, 서로 다른 언어
기후위기는 과학으로만 풀이되는 단순한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누구에게, 어떻게 다가오는가’에 따라 전혀 다른 모습으로 나타난다. 바로 이 지점에서 우리가 무심코 반복하는 ‘같은 위기’라는 말의 추상성과 모순이 드러난다. 기후위기를 둘러싼 갈등은 단순히 정보가 부족하거나 정책이 실패해서 생기는 것이 아니다. 서로 다른 삶의 방식과 감각이 부딪히는 자리에서 일어난다.
강원도 삼척의 석탄화력발전소 건설 논쟁을 보자. 정부와 기업은 지역경제 활성화와 에너지 안정성을 앞세워 건설을 추진했지만, 지역 주민과 환경단체는 바닷가 침식, 대기오염, 건강권 침해를 이유로 반대했다. 정부가 제시하는 경제성과 효율성은 숫자로 증명되지만, 매일 그 장소에서 숨 쉬며 살아가는 사람들에게는 피부로 와 닿는 위험이 더 현실적이다. 객관적 수치와 일상의 생존 감각이 부딪힐 때, ‘합리적’이라는 말은 누구의 언어인지 되묻게 된다.
독일 함바흐 숲 사례도 그렇다. 정부는 탄소 감축 목표를 위해 풍력발전단지를 조성하려 했지만, 숲을 삶의 터전으로 여기던 주민과 활동가들은 이에 맞섰다. 기후위기를 막겠다며 추진된 정책이 오히려 또 다른 위기를 만들었다고 느낀 것이다. 같은 ‘지구를 위한 일’이 누군가에게는 삶터의 파괴로 돌아왔다. 기술적·과학적 해법과 생태적·감각적 현실의 간극은 점점 벌어지고 있다.
이러한 갈등은 국제 무대에서도 반복된다. 기후총회(COP) 협상장 밖에서 청년과 원주민 활동가들은 “기후정의 없는 기후 정책은 없다”라고 외친다. 그 목소리는 배출량 목표치와 기술 타협 중심의 의제와 충돌한다. 한국에서도 환경단체들은 ‘정의로운 전환’을 요구하며, 탈탄소 과정에서 취약계층과 노동자를 고려하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정부는 여전히 재정과 기술 중심의 로드맵을 내세우며 이 요구를 주변부로 밀어낸다.
더 심각한 것은 아예 목소리를 낼 기회조차 없는 존재들의 현실이다. 아마존 원주민들은 ‘지구를 위한 산림 보존 정책’이 오히려 생존권과 자치권을 위협한다고 말하지만, 이는 좀처럼 고려되지 않는다. 거대한 생태보호 프로젝트의 명분 속에서, 그 땅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구체적 삶이 지워진다. 한국의 에너지 빈곤층도 마찬가지다. 누군가는 에너지 전환을 투자 기회로 인식하지만, 누군가는 올겨울 난방조차 틀지 못할까 두려워한다. “전기요금을 올리자”는 말은 어떤 이에게는 불편함이지만, 누군가에게는 곧장 생존의 벼랑으로 이어진다.
이처럼 기후위기를 둘러싼 갈등은 단순한 입장 차이를 넘어선다. 서로 다른 방식으로 세계를 구성하며 살아가는 존재들이 만나는 자리에서, 과학의 언어와 생존의 언어가 맞붙는다. 정책의 시간과 일상의 시간이 충돌하고, 기술적 해법과 감각적 현실이 엇갈린다. 같은 ‘지구’를 말하지만, 그 안에서 서로 다른 ‘세계’를 살고 있다는 사실이 드러난다.
결국 우리는 ‘같은 위기’라는 말이 가리는 것들을 다시 보아야 한다. 갈등의 지도를 그린다는 것은, 누구와 함께 이 위기를 살아갈 것인지 묻는 일이다. 지금 필요한 것은 데이터에 담기지 못하는 생생한 삶의 감각을 함께 논의할 수 있는 자리다. 기후위기 담론 속에서 발언권을 잃은 침묵과, 그 침묵 속 존재들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이제 우리는 획일적인 위기의 서사들을 넘어, 그 안에서 가려진 세계들을 다시 드러내야 한다.